

글씨로 써서 나에게 전했던 말도 거의 없어졌다.
치료자로서 느끼는 한계와 후회,
6개월여 간의 시간이 헛되었다는 무력감,
나의 노력을 외면해 버린 것 같은 아이에 대한 원망.
제주의 가을은 아름다웠지만 나의 고민은 깊어갔다.
어딜 가나 귤이 풍성하다.
자연스럽게 귤을 까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게 일상이다. 특히 가공되지 않은 싱싱한
제주의 귤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시원하다.
제주의 초겨울의 시작은 매섭게 부는 바
람과 귤의 출현으로 알아챌 수 있다. 계절의 변화를 알아
챌 수 있는 많은 증거들처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
법은 없을까?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아이는 계속 나에게 오고 있다.
아이 엄마도 아이가 치료를 안 하겠다고 하거나 가기 싫다는
말은 안한다고 한다. 나는 왜 계속 아이가 여기에 오려고 하
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지도교수님의 조언으로 다시 시작한
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놀이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다시 아이의 놀이는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이전처
럼 글로 나에게 생각을 전하고 있다. 많이 회복이 되었지만
정작 회복이 안 되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
치료가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 치료를
잘 진행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감. 마음은 무겁기만 하
고 지쳐갈즈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제주도에 살면서 달라진 점은 한 달에도 몇 번씩 비행기를
탄다는 것. 50분의 짧은 국내선 여정이지만 공항과 비행기
가 주는 특유의 설렘은 지루한 삶에 활력을 준다. 전임의 교
육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간 날.
주제는 불안장애였고 강의 후에 다른 병원 선생님이 가져오
신 증례를 함께 토의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발표된 증례는 내가 놀이치료를 하고 있
는 아이와 같은 진단명이었다. 비슷한 증상에 비슷한 반응.
그 아이는 그렇게 심한 상황은 아니어서 몇 주 사이에 말을
했더라는 결론이 내려져, 나는 부러운 시선으로 증례를 꼼
꼼히 보았다. 그런데 그 증례 토의 시간을 지도해 주시던
다른 병원 교수님께서 이와 같은 아이를 치료하고 있는 사
람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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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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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보이자, 조금만 더 있으면 벙어리가 말을 하는 성경
에서의 기적이 지금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기적은 흔하지 않기에 기적이다.
제주의 가을은 짧은 만큼 강렬하다.
한라산의 아름다운 단풍, 오름의 억새풀들과 바람의 하모
니, 바다와 하늘의 가슴시리도록 푸른 선명함.
제주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전임의의 생활에 그만큼
적응하고 여유가 생겼다는 말일 터. 그 아이를 만나는 나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치료를 시작한
지 6개월여가 되는 시점.
고요한 호수 같았던 우리 사이에 파문이 이는 일들이 생겼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지 않았던 나였
지만, 아이가 2학기를 맞아서도 학교에서 전혀 변화가 없다
는 아이 엄마의 이야기를 접하고는 ‘6개월 정도면 치료효과
도 있어서 말을 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
기 시작했다. 그 생각이 나의 머리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
후로, 나의 평정심은 불안과 조바심으로 급격히 바뀌기 시
작했으며, 더 이상은 기다려 줄 수 없이 안달난 사람처럼 마
음이 급해졌다.
어느새 나는 그 아이에게 여느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을
하라는 압박을 여러 모습을 통해 계속 보내고 있었고, ‘어서
나에게 말을 해’,‘ 이젠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라고 하는 나
의 속마음은 그대로 아이에게 전해졌다.
그 순간 모든 것은 ‘Stop’. 아이는 놀이를 멈추었을 뿐 아니
라 나에게 종이에 써서 말하던 행동도 멈추었고, 나에게
6개월간 서서히 열었던 마음도 닫았다.
1시간동안 아무 놀이도 하지 않았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나의 끊임없는 회유에도 이미 굳게 닫힌 마음
은 열리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
그 다음 주에도 아이가 놀이실에 오기는 했지만 놀이는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처럼 혼자 하는 모래놀이로 변해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