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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을 들어 표시를 하고 조금은 자신이 없는 마음으로

거의 8개월 정도 치료를 하고 있는데 말은 하지 않고 있다고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그 교수님께서는 뜬금없

이 ‘아버지 만세’라는 창작 동화의 한 구절을 읽어주셨다.

한 아이가 학교에서 말을 안 해서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나

기도 하고,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기도 하는 내용이었

다. 또한 아이가 말을 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선생님의

반응이나 아이가 그 상황 속에서 긴장하고 입을 닫고 있는

모습의 묘사가 생생했다.

교수님은 이 동화를 읽어주시고는 몇 년이 지나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아이와의 경험을 이야기 하셨다. 그 아이 때문

에 너무나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이런 아이들

에게 중요한건 말을 하지 않는 증상 자체의 치료가 아니고

그 아이의 모습을 불안해하지 않고 기다리고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의 존재라고 하셨다. 그리고 교수님은 나에게 내가 느끼

지 못하겠지만 알게 모르게 그 아이는 나아지고 있고 성장하

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1년 가까이 그 아이를 기다려

주고 인내해 주고 있는 나의 수고에 대해 격려해주셨다.

나는 순간 울컥했다.

이 아이와 같은 아이가 한명이 아니라는 사실과,

훌륭하신 교수님들도 그런 아이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마음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말씀을 마치시면서 교수님은 나에게 왜 그 아이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생각이 드는데도 1년 가까이 나에게

오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그렇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말은 안하고 있지만 뭔가 좋아지고 있는 거라고?

그게 정말일까?

1년여의 시간이 헛되지 않은 시간이었을까?

묘한 혼란감과 함께 제주도로 내려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야간 비행은 언제나 그렇듯 설렌다.

제주의 야경은 언제나 고요하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조금씩 요동치고 있었다.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진 지는 오래되었고, 머플러를 걸치지

않고는 제주의 바람을 이겨내기 힘들다.

삼다(三多) 중의 하나인 제주의 겨울바람은 뼈 속까지 스며

드는 냉기가 서려있다.

제주에도 겨울은 왔다. 그리고 다시 아이를 만났다.

오늘도 여느 때와 변함없이 나는말을 하고 그 아이는 글을

써서 나에게 말한다. 요새는 부쩍 놀이의 대부분을 인형의

집 놀이에 할애를 한다.

그 인형의 집의 주인공은 그 아이와 내가 되었고, 상상의

집에서 나는 그 아이의 친근한 아빠의 역할을 하며 맛있는

음식을 해준다. 물론 누구보다도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

은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아이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이가 이야기 하지 않는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지만, 곰곰

이 생각해보니 사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아이가 방법은

다르지만 나와 열심히 말하고 있고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

을 조금씩 열려고 한다.

가끔은 아이에게 ‘이젠 괜찮으니까 말을 해봐’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중요한 것이 지금

당장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말은 언제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닫힌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는다. 아니 서두

른다고 해서 열리는 마음이었다면 벌써 열렸을 것이다.

끝까지 기다려주고 참아 주어야 한다. 아이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불안해하고 걱정해 할

때, 적어도 세상에 한 사람 정도는 그 불안을 이해해주고 기

다려 줄 수 있어야 그 불안함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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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The Best Care”

상반기

문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