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노의
학교에 다닌 기간이 길었고 그 이후의 수련기간 또한 길었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지만 30대 후반에야
비로소 나름의 진료를 하였고 그 이후의 삶은 결국 병원-환자-집-병원-환자-집...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어느 정도 싹트고 있지만 점점 학문적인 순수함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때 마지막 배움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 상기되었다. 내게 연수를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각박한 일상에 대한 미래의 보상이었고 희망이었다.
제주대에 근무한지 10년 즈음에 나는 연수를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들은 너무 어리고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아있었
지만 마음이 너무 늙기 전에 뭔가를 시작해야 하나라도 건질 수 있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연수지 결정을 위해 여러 조언을 구했는데, 그때 선생님들이 해준 말은 “샌디애고는
알아봤어?”, “휴스턴은 어때?” 이런류의 말이었다. 내가 마음에 정했던 것은 병원
으로는 연수가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실 임상적인 면은 한국이 미국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느낀 것.
그리고 위암과 내시경에 대해서는 한국이 독보적인 상황에서 미국에 그다지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샌디애고 지역의 연수지를 알아보았다.
그곳에 유명한 소화기 운동질환 연구센터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연수를 나갔는데
내가 알아볼 때는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학회 선생님들과
상의를 해 보았다. “너 대도시가 아니어도 괜찮겠어?”라는 선생님 한분이 있어 선뜻
괜찮다고 했더니 리노를 소개해 주었다. 대도시는 아니지만 조용하고 비교적 안전하다는 것. 그리고 interstitial cell of
Cajal에 대해 대단한 연구 업적을 가진 곳이라고 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당시 연수를 나가있는 post-doc이 내 fellow때 의국 후배였다. 알아보니, 그
앞에는 fellow 선배, 그리고 더 앞에는 내 출신학교 후배가 이미 다녀갔단다. 그래서 이곳으로 결정하였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미국에서 1년이 넘는 세월을 지낸 느낌은 역시 사람들은 생각하는 바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초일류 선진국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고단하였다. 물론 돈이 있으면 정말 잘살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
었다. 단,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이야기하는 것과 강력한 공권력 그리고 그 공권력에 순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동요하지 않
는 사회 분위기를 볼 때 너무나도 부러웠다. 사회가 안정돼 있고 나보다 나은 다른 사람을 시기하기보다 자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사회 분위기를 통째로 우리나라에 가져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거대한 자연을 보고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많은 지역이 개발되지 않고 자연 상태로 있는 것이 그렇
게 부러울 수 없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직선 도로와 한번 길을 잃으면 영원히 찾아나올 수 없
을 것 같은 그 숲들, 그리고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있어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자칫하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
그때는 두려움이 앞섰고 육체적인 부담이 먼저 떠올라 그리 많이 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University of Nevada는 두 군데 분교가 있다. Reno와 Las Vegas에 각각 있는데
Las Vegas의 것이 본교의 색채가 짙다. University of Nevada, Reno (UNR)은
한국으로 치면 제주대의 위상과도 같은 지방의 작은 공립대학이지만 지질학과
생리학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생리학교실은 의학
전문대학원 소속이었는데, 학생들은 1,2 학년을 Reno에서 다니고 3,4학년이 되면
Las Vegas로 가서 임상과목을 배우게 된다. 말은 의학전문대학원에 속한 일개
과였지만 생리학교실 한 개과가 거의 단과대학 하나 정도의 조직을 갖고 있었고
주임교수(chairman)의 권한은 결코 대학원장보다 낮다고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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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병원
www.jejunuh.co.kr해 외 연 수
소화기내과
김흥업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