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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적은 편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이 적은 나지만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은 이 아이에게

만큼은 가장 많은 말을 나눈,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 듣는 것이 익숙한 나는, 안 듣는 것 같지만 이

아이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다는 걸 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나는,

이 아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이야기를 해보려고 노력한다

는 것을 안다.

말이 적은 나는, 이 아이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할 때 얼마나

마음속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지를 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나는 너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니까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라고.

제주도에 온지 벌써 1년.

고되고 바쁜 일상에 치어 아름다운 제주의 계절과 자연을

느끼지 못하고 섬 생활에 적응이 힘들어 고향을 그리워하던

이 육지 사람은 이젠 유유히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즐기고

제주의 맛 집을 찾아다니며 삶을 즐길 줄 아는 제주도민이

됐다.

아이들의 병의 진단과 치료에만 급급하여 아이들을 여유롭

게 돌아보지 못했던 풋내기 소아정신과 의사는 아이들과

노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지고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봄에 만났던 그 아이는 그때보다 키가 좀 더 컸고 웃음도

많아졌다. 나와도 많이 친해져서 놀이 시간에도 글로 나에

게 수다를 떨기도 하며, 조금씩 굳게 닫은 마음의 문을 열

고 있다.

증상의 변화보다 사람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걸 그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나에게 가르쳐 주었고, 나 또한 그 아이

에게 함께 해주고 기다려주는 ‘존재’로 남았다.

우리는 1년간 그렇게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고

서로를 성장시켰다.

나도 그 아이도 지난 1년 만큼 자랐지만,

우리 존재는 여전히 소중하다.

나는 아이를 통해,

아이는 나를 통해 그만큼 자랐다.

제주의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가득하더니 이내 눈이 내린다.

아...제주에도,

이 따뜻한 남쪽 섬에도 눈은 내리는 구나.

매서운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지금,

나는 제주의 봄을 기다린다.

문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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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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